위 사진은 2017년에 개봉됐던 다큐멘터리 영화 '직지코드'의 포스터입니다. 인류 최초의 금속활자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이후의 금속활자에 어떻게 영향을 주었는지를 보여주려고 했던 것 같은데, 의도와는 달리 '직지'가 구텐베르그의 금속활자에 어떻게 영향을 주었는지를 추정하는 수준에서 끝나버려 아쉬움이 있습니다. 정치적이거나 음모론적인 것에 너무 많은 시간을 들인 것도 개인적으로는 주제를 흐리게 한 것이었다고 봅니다. 관련된 역사기록이 거의 없어서 어쩔 수 없는 것이라 보이기는 합니다.

 

위 영화에서 언급이 된 바로는 인류 최초의 금속활자는 1200년대에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직지는 상/하로 나누어져 있는데 그중 하권이 영화에 등장한 것입니다. 직지의 출판연도는 1377년.. 구텐베르그가 1455년에 성서를 발간한 시기보다 많이 앞섭니다.

 

서양에서 금속활자 인쇄술을 체계적으로 완성한 사람은 구텐베르그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바티칸 비밀문서 수장고에서 발견된 교황 요한 22세의 친서 필사본에 의하면 1333년(충숙왕 복위 2년차) 사절단을 고려에 파견했던 기록이 있는데, 당시 우리 나라에 있던 금속활자 기술이 사절단에 의해 유럽에 전파되었을 것이라 추정되고 있습니다. 구텐베르그는 유럽 최초로 인쇄의 모든 요소(금속활자, 인쇄기, 잉크, 종이)를 체계적으로 잡았던 것이고, 그의 인쇄술과 당시의 활발한 상업활동의 분위기가 서로 맞물려서 대량출판이 시작이 되었습니다.

 

구텐베르그의 인쇄소 풍경 / 케이티이미지코리아

 

 

구텐베르그는 1455년 42줄 성서(한 페이지에 42줄이 찍혀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1460년 Catholicon이라는 백과사전과 36줄 성서를 발간합니다. 도중에 그는 사업을 위해 빌렸던 돈을 갚지 못하고 1455년 인쇄소를 동업자에게 빼앗깁니다. 구텐베르그는 이 사업의 실패를 극복하지 못하고 마지막 출판 후에는 시력을 잃고 대주교에세 경제적인 보조를 받다가 1468에 쓸쓸히 사망합니다.(독일, 마인츠)

 

구텐베르그는 경제적인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그의 동업자도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성서출판의 시장성을 본 여러 사람들이 앞다퉈 인쇄소를 차리기 시작합니다. 1500년경에는 독일에 60개의 출판도시가 형성되고, 이후 인쇄술은 유럽 전반으로 퍼져나갑니다.

 

이당시 출판물은 대부분이 성서였지만, 그 이외에도 많은 장르의 책이 출판되었습니다. 그로인해 사람들은 정보를 얻기 위해 소수의 지식인들에게 의존하지 않아도 되고, 그렇게 얻은 정보는 다양한 해석이 이루어집니다. 그 결과 기존 견해에 대한 도전도 이루어지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종교개혁과 르네상스입니다. 

 

이렇게 발전하는 인쇄술은 수학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는데, 당시 출판되는 수학책들은 상인들을 대상으로 집필된 계산법이었습니다. 상인들의 입장에서 급변하는 이 시기의 분위기에 뒤처지지 않으려면 계산을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책만으로는 알기 어려웠던 수학공부를 위해 수학교육도 따라서 중요해지기 시작하게 됩니다. 상인들은 수학을 잘 한다고 알려진 사람들을 개인교사로 채용하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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