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사진의 오른편에 있는 분이 최초의 필즈상 수상자 중 한명인 라르스 알포르스입니다(왼쪽은 그의 부인이죠.). 딸에게 수학자와 사귀지 말라고 충고를 하셨던 분이시죠ㅎㅎ 아마도 자기 말을 이해못하던 딸에 대한 뭔가가 담겨있던 말이 아니었을까 싶은데... 알포르스만 아시겠죠?



이 전기의 원문은 아래 링크를 따라가시면 보실 수 있습니다.


http://www-history.mcs.st-andrews.ac.uk/Biographies/Ahlfors.html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라르스 발레리안 알포르스
출생: 1907년 4월 18일 Helsingfors, 핀란드, 러시아 제국 (지금 헬싱키, 핀란드)
사망: 1996년 10 월 11일 피츠필드, 매사추세츠, 미국


라르스 알포르스는 그의 선조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 바 있습니다.:

내 아버지는 올란드 제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곳은 핀란드의 한 부분이지만 스웨덴 출신 사람들이 일부 살고 있고, 전적으로 스웨덴어를 사용하는 지역이지요. 제 선조들은 본토의 작은 도시인 비외르네보리(Björneborg)에서 올란드 제도의 마리에함으로 이주했습니다. 내 생각에 그들 중 일부는 범선의 함장이었고, 전세계를 대상으로 무역을 했습니다. 내 할아버지는 식료품 가게를 운영했는데, 본토에 아이들을 보내 교육을 시킬 수 있을 정도로 사업이 잘 됐던 것으로 보입니다. 올란드 제도에는 사실상 학교가 없었기 때문에 참 다행스러운 일이었죠. 내 아버지는 그 덕에 엔지니어가 될 수 있었고, 나중에 헬싱키의 폴리테크닉 공대의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가 언급했듯이, 그의 아버지 Karl Axel Mauritz Ahlfors(1874-1961; 간단히 Axel이라고도 불렀습니다.)는 헬싱키의 폴리테크닉에서 기계공학과 교수였습니다. 그의 어머니 Sievä Matilda Helander(1881-1907)는 알포르스를 낳다가 안타깝게도 사망했습니다. 알포르스에게는 Aune(1902-1921)과 Isa(1905-1990)라는 두 명의 누나가 있었어요. 알포르스는 생후 3년간 올란드 제도의 두 숙모의 보살핌을 받았습니다. 3세가 됐을 때는 아버지와 함께 살기 위해 헬싱키로 돌아왔죠. 아버지가 잘 보살펴주기는 했지만, 알포르스는 아버지를 매우 엄격한 사람으로 회상했습니다. 가족들은 모두 스웨덴어를 사용했는데, 알포르스는 나중에 홀로 핀란드어를 배웁니다. 그의 가족은 알포르스를 Lasse라는 별명으로 불렀었다 합니다. 또한, 그의 아버지는 Héléne Alice Palmroth(1884-1973)와 재혼을 했고 1917년 알포르스의 이복 여동생 Unga를 낳습니다.
알포르스가 성장하는 동안 핀란드는 러시아 제국의 일부였지만 합리적으로 통치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아버지는 가정부, 요리사, 가정교사들을 잘 채용할 수 있었지요. 하지만, 이런 상황이 오래 가지는 않았습니다. 1914년에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고, 1917년에는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고 핀란드는 독립국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1918년 핀란드 적군(공산군)이 반란을 일으켜 사회 민주당을 접수하여 헬싱키를 비롯한 핀란드 남부 도시를 통치했습니다. 남북전쟁이 일어나자 알포르스의 가족은 식량부족에 시달렸고 아버지 Axel은 공산군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독일의 지원을 받는 백군에 의해 적군은 신속히 정리가 되었고 Axel은 풀려나게 됐죠. 알포르스는 사립 스웨덴 어학 고등학교인 Nya Svenska Samskolan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알포르스는 그의 어린 시절을 이렇게 회상합니다.

어렸을 때 나는 수학이 무엇에 대한 학문인지도 모르면서도 수학에 매료되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신동이 아니었죠. 사실 최고학년이 되기 전까지는 수학적인 문헌을 접하지도 못했어요. 많은 신동들이 야심많은 부모들에 의해 망가지는 것을 보면 아버지의 그러한 구속이 고맙기도 하네요. 고등학교 교과과정에는 미적분학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어요. 하지만, 나는 드디어 가까스로 약간을 독학할 수 있었어요. 아버지의 공학 서재를 몰래 들어가봤거든요



이 시절 알포르스는 학교 공부 외로는 거의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는 스포츠를 싫어했고, 학교 가는 날만 좋아했습니다. 휴일이나 방학은 싫어했죠. 그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수학숙제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일반적인 학생들과는 좀 달라보였죠. 그가 좋아하는 것 중에는 언어도 있었네요. 그가 몹시 싫어하던 과목은 역사였습니다. 그는 이런 말을 했죠.

왜 다양한 사건과 사람에 연관된 연도를 암기해야 하죠? 차라리 전화번호를 외우는 게 낫겠어요. 그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고 심지어 바보같아 보이는 일이었어요. 내 역사 선생님은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요.



알포스의 아버지는 처음에 그가 엔지지어가 되기를 바랬습니다. 하지만 그의 아들이 수학에 푹 빠져있고 기계에 대해서는 어떠한 것도 완벽히 익힐 수 없으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들이 15세쯤 됐을 때 그는 아들에게 수학교수가 돼 보라고 했습니다. 알포르스는 1924년 17세의 나이로 헬싱키 대학에 입학합니다. 그곳에서 그는 에른스트 린델뢰프(Ernst Lindelöf)와 롤프 네반린나(Rolf Nevanlinna)의 가르침을 받습니다.

나는 신입생때 고등미적분학을 신청했는데, 원래 그러면 안되는 것이었죠. 개강 첫날 네반린나 교수님께 가서 수강허가를 해달라고 했을 때 교수님이 물으셨죠. “미적분학에 대해 좀 아니?” 나는 “네, 저는 미적분학을 공부했어요.”라고만 말하고 모든 것을 독학으로 했다고는 못했죠. 린델뢰프 교수님은 내가 막 앞서나가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으셔서 선수과목 전체를 시험보게 했어요. 난 고등미적분학을 좋아했어요. 공부가 아주 흥미로웠죠.



1928년에 알포르스는 Candidate’s degree(우리나라 석사학위와 비슷합니다.)를 받고 헬싱키 대학을 졸업합니다. 이 무렵 네반린나는 1928/29시즌 동안 헤르만 바일(Hermann Weyl)의 미국에 연구차 방문으로 빈 자리를 대체하기 위하여 취리히 대학에 가게 되는데, 린델뢰프는 알포르스에게 네반린나와 같이 떠나라고 합니다. 알포르스의 아버지와도 만나서 좋은 경험이 될 것이라고 설득을 하죠. 취리히 대학에서 네반린나는 핀란드에서와는 다른 수준으로 강의를 했습니다. 알포르스는 다음과 같이 회상합니다.

취리히에서 나는 진정한 수학을 처음 만났어요. 그것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통상 배워온 수학의 발자취가 아니라 현대적인 수학이었어요. 취리히에서 네반린나는 연구수준으로 강의를 했는데, 내게 완전히 새로운 감동을 주었죠. 나는 수학이 무엇에 대한 것인지를 이해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수학을 단지 배우는게 아니라 수학을 하기로 결심을 했죠. 이전까지는 이러한 생각이 명확하지 않았어요.



네반린나는 21년 전에 만들어진 당주아(Denjoy)의 추측에 대해 강의를 했는데, 이것은 전해석 함수의 점근값 개수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알포르스는 이 문제를 해결해서 국제적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겸손하게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는 등각 매핑에 기초한 새로운 접근법을 생각해내는 믿을 수 없는 행운을 가졌어요. 이 접근은 네반린나와 포여(Pólya)의 상당한 도움에 의해 추측의 완전한 증명을 할 수 있었어요.



그의 혁신적인 아이디어는 1929년에 두 개의 논문으로 발표됩니다. 하나는 Sur le nombre des valeurs asymptotique d’une function entire d’ordre fini이고 다른 하나는 Über die asymptotischen Werte der ganzen Funktionen endlicher Ordnung입니다.
취리히에서의 생활이 끝나고, 알포르스는 핀란드에 돌아가기 전 네반린나와 함께 파리에 3개월간 머뭅니다. 파리에서 그는 아르노 당주아(Arnaud Denjoy)를 만났습니다. 당주아는 그가 당주아 추측을 낸지 21년만에 21세의 수학자에 의해 해결이 되었다면서 이제 자기가 좋아하는 숫자는 21이라며 알포르스에게 말했다고 합니다.
핀란드에 돌아온 후 알포르스는 투르쿠의 스웨덴어 대학인 오부 아카데미(Åbu Akademi)에서 수학 강사로 임명이 됩니다. 1930년에는 박사논문을 발표합니다. 그 논문에는 그가 해낸 당주아 추측 증명이 서술되어 있었습니다. 논문에서는 전해석 함수가 $p$개의 서로 다른 점근값을 가지면 위수(order)는 $p/2$보다 크거나 같다고 되어 있습니다. 당주아는 특별한 경우에 이것이 성립함을 증명했었고, Torsten Carleman은 1921년 좀 약한 버전의 정리를 증명했었습니다.
1930년에서 1932년까지 알포르스는 록펠러 재단의 지원을 받아 파리를 수차례 방문했고, 유럽의 다른 연구소들도 방문을 했습니다. 1933년에는 헬싱키대학에서 겸임교수를 했고, 그 해에 Erna Martha Liesbeth Lehnert와 결혼을 했습니다. 그녀는 비엔나 태생인데, 그의 부모를 따라 스웨덴을 거쳐 핀란드로 이주한 여성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세 명의 딸이 있었는데, 그들의 이름은 Cynthia Mary, Vanessa Elisabeth, Caroline Gertrud입니다. Christopher라는 아들이 있었지만 유아기에 사망했습니다.
1935년 뮌헨에서 여행을 하던 중에 카라테오도리(Constantin Carathéodory)를 만났는데, 그는 알포르스를 미국 하버드대학의 한 자리에 추천해 주었습니다. 알포르스는 3년간 시험적으로 있기로 했죠. 이쯤에서 간단히 그의 수학적인 공헌을 인용하겠습니다.(D. Drasin, The impact of Lars Ahlfors's work in value-distribution theory, Ann. Acad. Sci. Fenn. Ser. A I Math. 13 (3) (1988), 329-353.)

핀란드에서 함수론은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알포르스는 그의 스승인 네반린나가 개발한 이론의 첫 파도가 지나간 직후부터 경력을 쌓았고, 그 파도의 물마루를 탔습니다. …. 알포르스 연구의 주된 방향은 그 이론의 기초로 돌아가서 보다 더 기하학적인(그리고 미분기하학적인) 관점에서 보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그 후에 나타나는 거의 모든 일반화 과정의 기초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또한, 우리는 여기서 이후에 나타난 준등각사상(quasiconformal mapping), 등각 매트릭(conformal metrics), 극단 길이(extremal length)등의 연구에 대한 기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936년에, 그는 오슬로에서 열린 국제 수학회의에서 최초로 필즈상을 받은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1936년 나는 오슬로 국제회의때 내 인생에 놀라운 한 때를 보내고 있었어요. 시상식이 있기 한 시간 전에 내가 최초로 필즈상을 받는 두 사람 중 하나라는 연락을 받았어요. 상의 권위가 지금만큼 대단하지 않은 시기이긴 했지만, 나는 특별함과 명예로움을 느꼈죠. 카라테오도리의 인용문에서는 분명하게 내 논문 “Zur Theorie der Überlagerungsflächen”이 네반린나의 유리형함수(meromorphic function)이론에 새로운 빛을 던져주었다고 언급했어요. 그 상은 내 연구에 대한 큰 확신을 주었어요.



필즈상을 받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위 논문에서 처음으로 준등각사상(quasiconformal mapping)이라는 용어가 등장했습니다. 카라테오도리는 그 논문이 해석학에서 완전히 새로운 분야를 열어주었다고 평가했습니다. 바로 ‘거리 위상(metric topology)’이었죠. 알포르스는 자신의 논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을 덧붙였습니다.

당시에는 준등각사상이 내 연구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할지 거의 알지 못했죠.



1938년, 알포르스는 헬싱키 대학으로부터 수학과 학장의 자리를 제안 받았는데, 당시 약간의 향수병을 앓고 있던 그는 하버드 대학에서의 일을 정리하고 그 제안을 수락합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어려운 시기가 찾아옵니다. 전쟁은 핀란드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켰고, 대학들은 문을 닫습니다.

역설적이게도, 나는 전쟁기간에 많은 연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이용할 수 있는 도서관이 없었는데도 말이죠.



알포르스의 가족은 전쟁기간동안 스웨덴으로 이주를 해서 친척들과 살았습니다. 알포르스는 헬싱키에 남았는데, 당시 그 곳은 남학생들이 거의 없어서 대학들이 문을 닫은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도서관의 자료를 이용할 수 없는 상태였지만 그는 연구에 몰두할 수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연구는 방공호에서 이루어졌죠. 겨울전쟁이 끝나고나서 그의 가족들은 핀란드로 돌아왔습니다.
한편, 1941년 독일의 소련침공 후 핀란드는 독일을 지지했습니다. 소련은 독일의 진격을 막으려 하던 초기에 핀란드에 우호적이었으나, 전황이 바뀌면서 핀란드를 공격했습니다. 1944년 취리히에서의 자리 제안은 그와 가족들이 처한 어려움을 타개하는 데 좋은 기회가 되는 것 같았습니다. 이 시기 알포르스는 건강상태가 안좋았고, 심장박동도 불규칙적이었기 때문에 그는 그의 가족과 함께 스웨덴으로 갈 수 있었고, 그 곳에서 Arne Beurling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내가 핀란드를 떠나 스웨덴으로 갈 수 있게 되었을 때 10크라운 이상은 소지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어떻게 했을까요? 필즈메달을 밀입국해서 전당포에 맡겼습니다. 확신하건데 전당포에 맡겨졌던 유일한 필즈메달일 거에요. 이렇게 약간의 돈을 얻은 직후, 스웨덴의 어떤 사람들이 메달을 되찾을 수 있게 도와줬어요.



하지만, 전쟁으로 인해 취리히에서 제안한 자리를 찾기 위한 스위스로의 여행은 거의 불가능해져갔습니다. 1945년 3월, 달조차 보이지 않는 밤에, 스톡홀름에서 스코틀랜드의 프레스트윅(Prestwick)으로 가는 비행기편이 구해졌고, 그의 가족은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그 비행기는 수리해서 재생된 플라잉 포트리스(보잉 B-17)였어요. 승객들은 12명 정도였던 것 같아요. 비행기가 가압이 되지 않아 각자 산소마스크를 착용해서 숨을 쉬어야 했죠. 다들 구명조끼를 입고 있었어요. 5, 6세밖에 되지 않은 우리 아이들도 이것들이 주는 위험의 암시를 잘 이해할 수 있었어요.



글래스고에서 그들은 기차로 런던까지 갔고, 그 다음에는 디에쁘(Dieppe)로의 항로를 타고 파리를 경유해 프랑스를 가로질러 스위스로 가는 힘든 여행을 했습니다.

내가 기술기하를 가르쳐야 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처음으로 실망을 했어요. 이 과목은 스위스 고등학교와 학부 교과과정에 있는 것이었죠. 게다가 아침 7시에서 9시까지 그 수업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두번째로 충격을 받았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천천히 내 일에 적응해 나갔어요. 아주 고급 수학은 아니었지만 다소 어려운 강의도 했죠. Fueter와 그의 동료교수 Finsler는 나이가 많았어요. 그래서, 내가 채용된 이유는 쓸만한 원어민 교수를 구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게 너무 뻔히 보였죠. 나는 아주 중요한 시기에 있는 많은 학생들을 가르쳤어요. 그들 중 상당수의 학생들이 내 친구로 남아서 지금은 그들 나름대로 중요한 수학자들이 되어 있다는 것을 말할 수 있게 되어 무척 행복해요. 취리히에서의 생활은 솔직히 행복하지 않았어요. 전후시대는 스위스를 기반으로 두지 않은 이방인에게 좋은 시기가 아니었어요. … 내 아내와 나는 절친들의 테두리를 벗어나서는 환영을 받지 못했어요.



그래서 1946년에 하버드에서 제공하는 자리는 기쁘게 받아들여졌습니다. 채용 2년 후 그는 수학과 학장이 되죠. 1964년에는 William Caspar Graustein 교수로 선정되었습니다. James Jenkins는 그의 논문에서 알포르스의 하버드 생활 초기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알포르스는 그의 대학원 학생들과의 미팅에 매우 성실했어요. 하지만, 그의 역할은 새로운 아이디어나 제안 보다는 호응을 해주는데 있었어요. (적어도 내 경우에는 말이죠.) 1947년 봄학기에 알포르스는 극단 거리(extremal metric)의 방법론에 대한 강의를 했어요. 이것은 그 당시에 개발 초기단계의 이론이었죠. 1947-1948 시즌에는 변분법(calculus of variations) 강의를 했고, 1948-1949 시즌에는 리만곡면에 대한 강의를 했는데, 주된 내용은 이전에 교수님이 연구했던 슈바르츠 보조정리를 유한경계면을 가지는 곡면들로 확장하는 것이었어요. 내가 학교 다니는 동안에는 정기 세미나를 연 적이 없어요. 한 해는, Teichmüller의 논문에 대한 연속강의를 한 적이 있는데, 아마도 교수님이 연구하던 준등각사상에 대한 논문 준비를 위한 것이었던 것 같아요.


다음 논문에 알포르스의 수학이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F. Gehring, I. Kra, S. G. Krantz (ed.) and R. Osserman, The mathematics of Lars Valerian Ahlfors, Notices Amer. Math. Soc. 45 (2) (1998), 233-242.

위 논문에, 알포르스의 업적을 Conformal geometry, Kleinian groups와 Quasiconformal mappings라는 제목들로 서술해 놓았습니다. 이 절들은 아래 책에 다시 나타납니다.

F. Gehring, Lars Valerian Ahlfors 1907-1996, Biographical Memoirs 87 (National Academy of Sciences, Washington D.C., 2005), 1-28.

알포르스의 책은 오래도록 중요하게 취급됩니다. 그가 저술한 책들은 Complex Analysis(1953), Riemann Surfaces(with Leo Sario; 1960), Lectures on quasi-conformal mappings(1966), Conformal invariants: topics in geometric function theory(1973), Möbius transformations in several dimensions(1981) 등이 있습니다. 알포르스의 책에 대한 논평은 다음 링크를 따라가시면 볼 수 있습니다. 
지금 보고 있는 글의 원저자인 E. F. Robertson은 알포르스의 Complex Analysis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 책은 Edward Copson이 복소해석학을 강의할 때 내게 추천해준 것입니다. 사실 Copson 본인이 최상의 복소해석학 책을 썼음에도 이 책을 내게 추천해 준 것은 알포르스에 대한 일종의 헌사였어요. 알포르스의 복소해석학은 아름다운 문체를 가지고 있었고, 최상의 질을 가진 수학 교과서의 모범이었으며, 책 주제에 대해 명확함과 흥미로움을 잘 녹여낸 것이었어요.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을 위해 복소해석학 초판의 머리말을 다음 링크에서 제공하고,

책 내용의 일부를 다음 링크에서 제공합니다:

알포르스는 수학에서 이룩한 그의 돋보이는 업적에 대해 많은 찬사를 받았습니다. 앞서 언급한 최초의 필즈 메달을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 꼽아야 하겠지만, 다른 중요한 상으로 1968년 핀란드 국제상과 1981년 울프상도 있습니다. 울프상은

… 기하학적 함수론에서의 중요한 발견과 강력한 새로운 방법의 창조에 대해


주어졌습니다. 울프상에서 따온 다음 인용은 그의 업적에 대한 좋은 개요가 되겠습니다:

반세기가 넘게 복소수 함수론은 알포르스 (명예) 교수의 연구결과와 생각에 안내를 받았습니다. 그의 업적으로는 당주아 추측의 증명, 네반린나 이론의 기하학적 유도, 슈바르츠 보조정리의 중요한 일반화, 극단길이의 방법론의 발전(Beurling과 공동연구), 리만곡면론, 준등각사상, Teichmüller 공간에서의 수많은 결정적인 결과들이 있습니다. 알포르스의 유명한 클라인 군의 유한성 정리와 극한 집합에서의 그의 결과는 중요한 연구영역에 새생명을 불어넣어주었습니다. 그는 현재 고차원에서의 준등각 변형에 대한 선구적인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알포르스의 영향은 광범위하고 유익했습니다. 그의 방법론은 심오한 기하학적 통찰과 미묘한 해석학적 기법을 융합했습니다. 그는 이것을 간단하고도 명료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종종 그는 교육에서의 중요한 문제를 공략하고 해결해냈습니다. 종종 다른 수학자들은 그가 오래전에 한 연구에서 영감을 얻었습니다. 어떤 면에서, 현재 활동하는 모든 복소해석학자들은 그의 제자들입니다.


그가 받은 다른 찬사로 보스턴 대학(1953), 오부 아카데미(1970), 취리히 대학(1977), 런던대학(1978)년에 받은 명예학위들이 있습니다. 또한, 그는 페니카 과학회(Societas Scientiarum Fennica), 핀란드 과학회(Finnish Academy of Science), 미국립 과학 아카데미(National Academy of Sciences), 왕립 스웨덴 과학회(Royal Swedish Academy of Sciences), 왕립 덴마크 과학회(Royal Danish Academy of Sciences)에 선출되었습니다.
이제, 다음 Troels Jørgensen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 전기를 마치겠습니다.

한 세기의 4분의 1이나 되는 기간 동안 알포르스를 알고 지낸 것은 내게 행운이었어요. 그는 자극을 주는 수학자였고, 아주 특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수학에 대한 직관과 즐거움은 그의 뛰어난 연구 능력과 결합하여 60년 넘는 경력 내내 그를 균형 잡힌 장인이 되도록 했습니다. 그는 지적 자극을 즐겼어요. 그가 여태 받아온 상들은 그가 이룬 업적에 비하면 소박한 편이죠. 그의 70세 생일을 기념하는 연회에서 알포르스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어요. “나는 물고기들이 많이 있는 곳에서 낚시하는 것을 좋아해. 대어 하나만 잡기 위해 모든 시도를 다 하지는 않지.”


Article by: J J O'Connor and E F Robert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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