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으로 보기에, 수학계는 항상 평화로워 보입니다. 공인된 수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일반적으로 밟아야 하는 과정이 있고, 기성 수학자들은 다른 분야보다 신인들의 말(증명)을 잘 들어주는 편입니다. 대부분의 수학자들이 이런 과정을 거쳐 수학계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가끔은 일반적인 수학과정을 거치지 않은 뛰어난 수학자가 나타나서 수학계를 놀라게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수학자들은 기존 수학계에 들어가기 위해서 그만큼의 고통을 견뎌야 했습니다. 라마누잔이 그러했고, 그라스만도 그러했습니다.

Hermann Günther Graßmann; 1809/4/15 - 1877/9/26 http://www-history.mcs.st-andrews.ac.uk/PictDisplay/Grassmann.html




그라스만의 대학 전공은 신학입니다.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를 다녔죠. 대학 졸업까지 수학이나 물리학을 공부한 적은 없습니다. 졸업후 수학에 관심이 생겨 고등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쳐 볼 생각으로 자격시험에 응시했지만 처음에는 탈락했을 정도로 수학실력이 뛰어나지는 못했었나봅니다. (결국 자격시험에 통과하기는 합니다.) 처음 수학에 관심을 가졌을 1830년쯤부터 연구를 거듭하여 수학의 기초를 다시 잡아 선형대수학을 발견합니다. 그라스만은 1844년 연구결과를 책으로 발표합니다.

Die Lineale Ausdehnungslehre, ein neuer Zweig der Mathematik, 1844 (The Theory of Linear Extension, a New Branch of Mathematics; 선형 확장론, 수학의 새 분야)




이 책은 서문(preface)만 12쪽이고 서론(introduction)만 16쪽이며 300페이지나 되는 두꺼운 책입니다. 그는 서문에서 기하학과 같이 순수하게 추상적인 방법으로 구성할 수 있는 수학의 새로운 분야를 발견했다고 선언합니다. 그는 이 책에서 $n$차원 공간과 교환법칙이 성립하지 않는 곱셈을 소개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은 새로운 개념을 이해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설명을 해서 읽어내기 어려웠습니다. 예를 들면


$n$차원 공간의 이동은 주어진 $n$개의 독립적인 방법으로 이동한 $n$개의 이동을 더한 것과 같으며, 그 합은 설정된 $n$개의 방법에 대해 유일하다.

와 같이 처음 개념을 접하는 사람이 알아듣기 어렵게 되어 있습니다. 가우스는 그라스만에게


  ... 자네 책의 핵심을 이해하려면 자네가 사용하는 특수용어에 먼저 익숙해져야 할 필요가 있네 ... 하지만, 그러려면 내가 다른 일에 매여있지 않아 자유로운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하겠네 ... 


라고 말을 했고(1844), 뫼비우스는 그의 친구에게 쓴 편지(1846)에서


  ... 나는 수차례 이 책을 읽어보려고 시도해 보았는데, 첫 페이지도 넘겨보지 못했다. ... 


라 했습니다.


그라스만은 자신의 연구결과에 확신을 가졌기에, 이번에는 당시 원론의 구조를 본따서 철학적인 보충설명을 다 들어내고 정의, 정리, 증명만으로 이루어진 개정판을 다시 펴냅니다.

Die Ausdehnungslehre: Vollständig und in strenger Form bearbeitet, 1862 (The Theory of Extension, Thoroughly and Rigorously Treated)




이 책은 300부가 인쇄되었는데, 이번에는 출판에 드는 모든 비용을 그라스만이 부담했습니다. 이 책은 영문 번역판도 있습니다.




그라스만이 야심차게 준비했던 개정판도 초판의 혹평에 영향을 받았는지 주목을 받지 못합니다. 초판이 나온 30년 후, 그라스만은 출판사로부터 다음과 같은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습니다.


당신의 책 Die Ausdehnungslehre이 절판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당신의 책이 너무 팔리지 않아 600부 정도는 1864년 폐기되었고, 남아있던 책은 우리 도서관에 보관된 한 권을 제외하고 모두 팔렸습니다.

실망한 그라스만은 이후 기하학에 대한 관심을 접고 수학자들과의 접촉도 끊어버립니다. 말년에는 수학에서 떠나 언어학 연구를 합니다.


그라스만의 연구는 리만의 제자 항켈에 의해 재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됩니다.(1867) 그라스만이 2판에 걸쳐 알려주려고 했던 선형대수의 개념을 목록으로 만들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일차독립
  2. 차원
  3. Exchange Theorem
  4. 부분공간
  5. 부분공간의 join과 meet
  6. 부분공간으로의 projection
  7. 좌표변환
  8. 내적과 외적
  9. 해공간
  10. 직교성
  11. 일차변환
  12. 일차변환의 행렬표현
  13. rank-nullity theorem
  14. 고유치와 고유공간
  15. 특성다항식
  16. 대각화 가능성
  17. primary decomposition theorem
  18. 미분방정식과 해석학으로의 응용
  19. Exterior Algebra
  20. bra - ket notation
  21. ...

위 목록의 모두를 그라스만이 처음 생각한 것은 아닙니다. 그라스만이 처음 책을 냈을 때 선형대수학이 주목을 받았다면 선형대수학의 대부분의 주제에 그라스만의 이름이 붙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라스만의 업적이 알려질 무렵에는 이미 다른 수학자들이 독립적으로 그라스만이 이룬 것을 재발견한 상태였어서 선형대수학의 발달에 그라스만의 연구는 기여도를 인정받지 못하는 결과가 나옵니다. 현재 그라스만의 이름이 붙어있는 수학의 영역은 Grassmann Algebra, Grassmann Manifold 정도입니다. 그라스만의 책 1판은 지금은 역사상 아주 가치있는 책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만, 가장 읽기 힘든 고전으로도 꼽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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