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왈피리어를 사용하는 지역" By Olegzima - Библиотека Конгресса США [1], CIA World Factbook[2], en:Wikipedia:Blank maps Image:BlankMap-World6.svg, CC BY-SA 3.0,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1863396



다음은 최근에 작성중인 책 본문의 일부입니다. 수정될 가능성이 높기는 하지만, 그래도 올려봅니다. 출처와 근거자료는 책에서 확인이 가능할 것입니다.




인간은 원래 수렵생활을 하고 살았다. 3만년 동안이나 자급자족을 해온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주민 왈피리(Warlpiri)족은 여태까지도 오래 전 시작된 수렵생활을 유지하고 있는데, 그들이 사용하는 말에 보이는 숫자는 '하나', '둘', '많다' 뿐이다.[ℹ] 

수렵생활의 특성상 이들은 이동이 많아서 무언가를 저장할 필요도 없다. 가족규모로 이동을 했기에 구성원이 몇 명인지도 궁금하지도 않다. 수렵생활은 물질적으로 풍족하지는 않겠지만 신선한 음식들을 통해 행복을 느낄 수도 있다고 본다. 이때문에 수를 다루는 정확한 언어는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그러면 수 개념은 어떻게 나타난 것일까? 수와 셈은 인간만의 재능인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최근에 발표된 논문[ℹ]을 통해 알 수 있다. 요즘에는 짐승들도 숫자를 알고 셈을 한다. 왈피리족도 수에 대한 적절한 언어가 없는데 어떻게 짐승따위가 숫자를 세고 셈을 하는 것일까? 셈을 하는 동물들에게 왈피리족보다 뛰어난 숫자언어가 있는 것일까? 최근 오스트리아 영어권 어린이들과 왈피리족의 어린이간 연산실력 비교 테스트[ℹ]를 보면 두 그룹간에 특별한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즉, 적은 규모의 숫자를 세거나 더하고 빼고 서로 다른 수들을 비교하는 일에서 언어가 꼭 필요하지는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록을 위한 숫자는 인류가 정착생활을 하면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사물의 개수만큼 그림이나 선을 동물 뼈, 동굴 벽, 동물 가죽에 그려내면서, 또는 세려는 대상만큼의 돌조각을 이용해서 숫자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이때쯤에 과일 세 개와 어린이 세 명을 같은 숫자로 나타낼 수 있다는 것과 같은 개념이 확실해진다. 이후, 인간은 더 큰 집단을 관리해야 할 필요가 있게 되면서 큰 수를 다루는 방법을 고민하게 된다. 그 고민의 결과로, 여러 숫자를 묶어 큰 숫자를 나타내는 그림이나 돌조각들을 정하게 되었고, 이러면서 진법의 초기 개념이 탄생한다. 지금 우리가 쓰는 숫자는 열 개의 작은 조각을 하나의 큰 조각으로 다루고, 그 큰 조각 열개가 모이면 더 큰 조각 하나로 다루던 어느 사람들의 것(십진법이라 한다.)을 발전시켜서 쓰는 것이다. 그렇게 탄생했던 숫자의 표현법은 아직도 발견할 수 있는데, 로마숫자가 그러하다. 요즘은 IV가 4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고대 로마숫자는 원칙적으로 모든 문자가 위치에 상관없이 같은 값을 가졌다. 이 중 몇 가지를 나열한다면 I은 1, V는 5, X는 10, L은 50, C는 100, D는 500, M은 1000을 뜻했다. 물론, 읽기 좋도록 큰 수를 나타내는 문자가 먼저 기록된다는 관례가 있었다. 하지만, 이런 숫자들은 큰 수가 나올 때마다 새로운 수를 나타낼 문자를 만들어야만 했고, 기록도 어려웠다.

이러한 숫자표현의 돌파구라 할 수 있는 개념을 생각해낸 사람들은 바빌로니아인, 중국인, 마야인들이다[ℹ]. 이들은 같은 숫자 기호도 위치에 따라 다른 값을 가지는 위치 원리를 생각해냈다. 오늘날 사용되는 숫자 조합의 원리인데, 예를 들어 15의 5는 실제로도 5라는 값을 가지지만, 512의 5는 500이라는 값을 가진다는 것과 같은 개념이다. 앞서 말한 문명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사용하는 진법 내에서 이러한 원리를 이용해 숫자를 기록했다. 더 나아가, 바빌로니아인과 마야인들은 0에 해당되는 기호도 만들어냈다. 하지만, 이들은 수천년간 자신들이 발견한 숫자체계를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법을 잘 알지 못했다.

현대 기수법은 인도에서 만들어졌다. 그리스인이 그러한 개념의 기초를 제공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은 수학사적으로 위대한 업적을 이뤄낸 그리스인들에 대한 감탄의 지나친 표현이다. 그리스인들은 숫자계산을 위한 주판 비슷한 것을 만들어서 숫자계산을 했기에 아르키메데스와 같은 뛰어난 사람은 10의 64제곱에 가까운 값('천체'라는 어떤 가상의 입체가 수용할 수 있는 모래알의 수인데, 현재의 상식으로는 말이 안되는 모델이다.)을 계산할 수도 있었지만, 워낙에 하층민들의 혜택을 받던 귀족분들이시라 숫자기호의 발명에는 관심이 없었다. 보통 그리스인들은 로마자와 비슷한 숫자체계를 가지고 불편한 계산을 했었다.

현대인이 사용하는 위치원리와 0은 5세기경 인도에서 만들어졌다. 숫자 사용의 최초의 예는 "Lokavibhāga"라는 우주학의 논문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당시 인도에는 "아라비아숫자"라는 현대 기호는 없었지만, 나름대로 고안된 숫자기호가 있었고, 위치 원리에 의해 숫자들을 기록하는 학자들이 있었고, 무엇보다 이 학자들은 자신이 쓴 논문의 독자로 상당히 큰 규모의 대중을 생각하고 있었기에 이 숫자는 빠른 속도로 대중화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초기의 0은 1024나 5020처럼 자릿수의 빈 칸을 채우는 용도로만 쓰였다.

인도에서 만들어진 0은 탄생 후 반세기도 지나지 않아 단순한 빈자리 채우기 기호 이상의 기능을 가지게 된다. 그들은 상상력을 동원해서 1-1=0, 2-2=0처럼 '양이 없음'을 나타내는 숫자로 0을 사용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마치 한글에서 초성 'ㅇ'이 음가가 없이 자리채우기로 쓰이는 반면 받침 'ㅇ'은 음가를 가지는 것과도 같은 원리이다. 이로써 최종적으로 현대인이 사용하는 숫자가 완성이 되었다. 이 숫자의 효율성과 독창성은 세종대왕의 한글창제와도 맞먹는 사건이었다. 더 나아가 이것은 전세계인이 같은 의미로 사용하게 될 최초의 문자체계가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이후, 인도에서는 이 숫자들을 이용한 셈법이 눈부시게 발전하게 된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이 숫자들이 인도인들에 한해 사용이 되고 있었다.

앞서 잠깐 언급이 되었던 그리스인들의 업적은 4세기 게르만족, 7세기 회교도들에 의해 많은 부분 손실이 되고 말았다. 그 와중에 아랍인들은 그리스인들의 업적을 아랍어로 번역, 기록을 했다. 아랍인들은 동양문화에도 관심을 가지고 역시 번역, 기록을 했는데, 그들이 8세기 말에 인도의 수를 만났을 때 호기심 많은 아랍인들은 그 숫자의 가치를 단번에 알아보고 급속히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그리스인의 업적과 인도 숫자는 아랍인에 의해 융합이 되고, 아랍인들은 그것들을 토대로 산술, 대수학, 기하학, 삼각법, 천문학을 발전시켰다. 그리고, 드디어 9세기 무렵, 서아랍인들은 인도인들이 그간 사용해왔던 지저분하고 다양한 숫자기호를 정리하여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기호인 아라비아숫자를 정착시킨다. 그러나, 아직도 이 수는 아랍인들까지만 인지하고 있었다. 이 당시 근처 유럽인들은 아직도 손가락 계산을 하고 있었다.

자부심 많은 유럽인들이 아라비아숫자를 접한 후부터 일상적으로 받아들이기까지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유럽인들이 아라비아숫자를 접한 데는 프랑스 수도사 게르베르의 공이 크다. 과정은 확실하지 않지만, 아랍인들에게서 숫자를 접하고 그것을 972년경부터 서구문명과 함께 유럽인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0은 소개가 되지 않았고, 계산법도 소개되지 않았다. 그래서, 큰 파급효과는 없었다. 그냥 0이 빠진 아라비아숫자가 그들이 사용하는 셈판에 새겨지는 정도였다. 그동안 이루어진 것은 아라비아숫자의 글씨체가 좀 다듬어진 것일 뿐이다.

기독교도들은 1095년 십자군 전쟁을 일으킨다. 그들은 무력으로 아랍계를 정복하고 자신들의 종교를 강요하려다가 앞서 게르베르가 가져오지 못한 0을 얻어온다. 또한, 계산법도 얻어오게 된다. 이제 유럽인들은 셈틀을 쓰지 않고도 계산을 할 방법을 접하게 된다. 아랍의 문물에 매료된 어떤 이들은 아랍어로 된 책들을 번역하기도 한다. 처음에는 에스파냐어로, 그다음에는 라틴어로... 13세기 초, 피보나치(Fibonacci)는 "Liber Abaci"라는 논문을 내서 현대계산법의 전파에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이교도들의 문물을 유럽 전역으로 퍼뜨리는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정교하고 쉬운 아랍의 계산법을 익힌 피보나치의 제자들은 당시 사제들의 계산 능력에 대한 위협이 되었기에 마녀나 이단자로 몰려 화형을 당했다. 교회의 거부는 15세기까지 계속되어 아랍의 계산법은 유럽의 음지에서 전파되어 나갔다.

14, 15세기까지도 유럽의 대학에서는 기초적인 계산밖에 가르치지 않았다. 곱셈, 나눗셈을 배우려면 이탈리아로 유학을 가야 했다. 교회의 저항이 줄어든 16세기에 이르러 유럽인들은 예술과 학문의 부흥을 이루기 시작했다. 수학자들이 삼, 사차방정식의 근의 공식을 만들기 시작했고, 지동설이 발표되면서 현대의 수학, 과학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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